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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들어 일진일퇴(一進一退)하며 한반도 중부 지역에 전선이 고착되면서 후방에서도 전재(戰災) 복구와 국가 재건을 위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중등 교육을 보다 충실하게 하자는 논의도 일어났다. 곧 정책으로 결정되어 6년제 중학교를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분리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안동의 경우는 안동 중학교의 4 5 6학년을 분리하여 '안동고등학교'로 독립시키기로 하였다. 그 해 8월에 나는 안동고등학교 초대 교장에 임명되었다. 나는 향토 교육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안동고 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1951년 9월 초 어느 날, 태화동 안동중학교에 가서 4 5 6학년 학생을 접견하고, 새로 임명된 교감 김세위 선생, 안동중학교의 오동수, 남우섭, 김창수 선생 등과 함께 용상동 안동고등학교로 이사하였다. 이사는학생들을 동원하였다. 이사 짐은 학생들이 쓸 책걸상과 안동 중학교로 부터 얻은 칠판 3개가 전부였다. 학교 이사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말 그대로 최소 교구뿐이었으나, 안동 읍내를 가로지르는 보무(步武)는 당당하였다. 하지만 이미 답사를 하였기에 실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막상 책임져야 할 학생들을 이끌고 용상동 교정에 이르자, 학생들에게 미안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헤쳐나갈 일이 마치 태산처럼 실감나게 압박해 왔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명색이 그래도 공립 학교인데 교문과 운동장이 없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교실까지 없었던 것이다. 벌판 끝자락 산밑에 있는 민가 한 채가 학교의 유일한 시설이었다. 각오를 다지기는 하였지만 짐을 부리면서 후회로 마음이 꽤나 흔들렸다. 교실로는 쓸 수 없는 민가의 큰 방은 교감 사택으로, 마루는 직원실, 건넛방은 교무실로 배정하였다. 물론 교실은 없는 상태였다.

당장 수업부터 하였다. 수업이 개교의 출발이었니, 어찌 보면 제대로 된 시작이었다고나 할까. 감나무, 아카시아 나무에 칠판을 걸고 그 앞에 책상과 걸상을 배열하고 노천 수업을 실시하였다. 나도 교사들도 학생들도 이런 수업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비가 오면 산기슭 나무 밑으로 피하고 비가 그치면 다시 모여 수업하기도 하였다 지금 회고하면 아무리 전쟁중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여건이 미비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 궁핍한 시대 상황의 축도였고 사회정세 때문에 선생, 학생 모두 불평 하나 없이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다. 그 때의 모습이 정녕 그립다. 역설적이지만 지나고 보니 내 생애에서도 그 때가 영광의 시기였다.

1951년 이전에 경북에서 공립 인문고등학교로는 경북고등학교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 때에 대구에 대구고등학교를, 포항에 포항고등학교를, 안동에 안동고등학교를 새로 세운 것이다. 교사도 비품도 없는 학교였지만 그래도 경북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유일한 공립 인문고등학교였기에 전란을 이겼으며 생존에 허덕이면서도 안동군민과 경북 북부 지역민은 자제 교육에 희망을 걸면서 안동고등학교의 역할과 장래에 기대가 컸다. 나 자신도 이재민이며 자식을 둔 아버지로서 이러한 여망을 잘 알았다. 나의 교장으로서의 임무는 중차대하였다. 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로 스스로 독려하였다. 나는 좌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이 고향을 위하여 무에서 유 창조하는 기백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 학교를 훌륭한 학교로 만들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학교 시설 중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시설은 교사이다. 하지만 전란중인지라 도 당국이나 설립 기성회 어느 곳도 교사 건축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형편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소위 공립학교의 교장과 교사와 학생들이 교사 때문에 고민한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았다. 요로에 몇 번 촉구했지만 미안해하며 종당에는 난색만 표시할 뿐이었다. 내 자신 어떤 방법으로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임을 절감하였다. 우리 힘으로 해보자. 이 길밖에 없다! 나와 교사들과 학생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교사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 사제동행으로 이 일이 성공한다면 이 자체가 페허가 된 이 나라를 재건하는데 필요한 자활의 인재를 양성하는 '노작교육'에 성공하는 쾌거가 되어 교육적인 큰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9월 중순부터 우리는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진흙을 이겨서 흙벽돌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나와 교사들과 학생들이 동심일체가 되어 자기 집일보다도 열심히 성의껏 일하였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고 비가 오면 기별이 없어도 찍어놓은 흙벽돌이 빗물에 허물어 질까봐 3Km나 되는 읍내 집에서 분주히 달려와서 이런 저런 덮개로 덮어 주기도 하였다. 흙벽돌을 만드는 일방 흙벽돌을 쌓아 교실을 지었다. 흙벽돌 만들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리저리 재고 맞추고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곡예 하듯 쌓아 올리기를 시행착오와 더불어 거듭하였다. 흙벽돌 만들기와 축조공사는 거의 매일 날이 저물도록 진행되었으나 교대로 작업하여 수업에 큰 장애가 없도록 하였다. 학업성적에 큰 지장이 없었음은 이듬해부터 배출된 졸업생들의 대학 입학 성적이 좋았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약 2개월이 지난 12월 중순, 드디어 여덟 교실로 짜여진 교사가 완성되었다. 그날 안동고 가족들은 우리의 손과 땀으로 지어진 우람한 교사에 반신반의하며 한동안 환호하며 얼싸안고 기뻐하며 자축하였다. 이제 건물이 최소한 학교로서 기본 틀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닥쳐올 겨울에 추위를 피해 공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첨단 건물에 좋은 설비를 갖춘 안동고 재학생들에게는 전설일 것이고 참여한 당사자로서는 말하기 쑥스러우나 그것은 안동고 초창기에 출현한 하나의 신화였다. 그리고 그때 동고동락하였던 우리에게는 이후에 본 그 어떤 화려한 건물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영원히 빛나는 거대한 성채이다.

교사가 만들어지자 나는 교육 목표와 교훈을 설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많은 검토를 하였다 주지되어 있듯 교육 목표와 교훈은 그 학교의 존재 의의를 대변하는 이념이지만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허명(虛名)의 권위일 수 있고 그저 그럴듯한 부양(浮揚)에 그치거나 실제와의 괴리(乖離)만을 보여주어 졸속에 그치고 싶지 않았다.

궁리 끝에 안동은 옛부터 학자와 학자 출신 위정자가 많이 배출되어서 선비의 고장 또는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칭송된 사실을 주목하였다. 조선의 최고 학자이자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던 위대한 사표 퇴계 이황선생,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내며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국난을 수습하였던 서애 유성룡 선생 등 많은 기라성 같은 인재를 배출하였기에 '인다안동(人多安東)' 이라고도 하였다. 안동이 반드시 이어가야 할 유산이자 전통이었다. 대대로 안동은 도의를 숭상하고 인의예절을 잘 지켜왔지만, 근대 이후 존현양사(尊賢養士)의 서원교육이 시대의 풍파로 해체되면서 그 기맥(氣脈)이 쇠퇴해 있었다. 나는 이 점에 착안하여 안동고등학교 교육 목표를 첫째 '도의교육'(道義敎育)으로 설정하였다.

다음으로 전재 복구가 시급한 현실에 부응하는 목표를 모색해 보았다. 민생도 조악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하여 학교는 전란으로 잿더미가 된 이 나라를 하루 빨리 재건하는데 기여할 더욱 부지런히 일하는 실천지향 인재를 양성하여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실사구시에 따른 실용 근로 생산 후생, 이러한 시대 상황의 요구를 참작하여 둘째 '노작교육'(勞作敎育)으로 제정하였다.

그리고 각각 위 두 목표의 축약인 성실과 근면을 교훈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특정 시대를 초월하는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삶의 두 기본 수요를 함양하여야 한다는 의도도 있었다. 나는 두 교육목표의 비중을 같이 설정하였으나 궁극에 있어 인간 자체의 덕성이 우선하며 노작교육이 성공하려면 도의교육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되기에 온고지신(溫故知新)에 입각하여 도의교육의 이론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하였다.

그 다음으로 교육의 성과를 올리는데는 훌륭한 교사를 초빙하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사 진용을 제대로 짜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교장 1명, 교사 3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왕이면 서울에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게 할 요량이었다. 1952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4회 신입생을 받을 무렵부터 나는 대구로 부산으로 출장가서 초빙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예상은 했지만 이 일도 쉽지 않았다. 적임자들은 거의 모두 먼데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망설였다. 나는 스스로 교사를 지은 장한 학생들을 떠올리며 진력 설득도 하고 호소도 하였다. 그 결과 여러 우수한 분들을 안동고등학교의 교단에 서게 할 수 있었다. 기대한 대로 모두 쟁쟁하였고 안동고등학교가 초창기부터 명문이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나중에 이분들 중 김대선(金大璿)씨는 연세대로, 박영관(朴永觀)씨는 서울대로, 김석하(金錫夏)씨는 단국대로 변동균(邊東均) 이수일(李守一) 오원교(吳元敎)씨는 영남대로 진출하였다. 이와 같이 인격과 실력을 갖추고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와 자활의 의지로 열심히 배우는 학생들이 교학상장(敎學相長)하며 안동고의 교육성과를 드높이자 경북북부의 우수한 중학 졸업생이 모여들었다 1952년을 경과하고 1953년 7월에 휴전이 조인되면서도 안동고등학교는 여전히 시설이 미비하였으나 학교의 본질 영역인 교풍등 학교로서의 질서와 일상 수업 등 교육 분위기가 급속히 제고되었다.

1954년 초에 열린 제3회 졸업식도 잊을 수 없다. 1951년 개교 당시 1학년 막내였던 학생들이 졸업하였다.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고 노천수업을 받으며 선생님과 선배들을 따라 교사를 지었던 그 학생들이어서 감회가 유달랐다. 진심에 축원을 더하여 전도가 양양하기를 빌었다.

교세가 더욱 뻗어나가자 사계에서 주목하였고 문교부도 관심을 가졌다 안동고등학교는 전후 본격적인 중등교육 재건에 모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휴전 후 안동고등학교는 경북에서 유일한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로 선정되었다. 연구 주제는 '도의교육의 실천방안'이었다. 도의를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 안동의 안동고등학교가 도의교육 지정연구학교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으나, 적절한 지표 설정과 우리의 관련 노력이 성취한 한 결실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겠다. 문교부가 도의교육을 특별히 중시한 것은 전란으로 말미암은 시대 상황에서 파생된 파행(跛行)을 우려하는 교육적 대응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때는 바로 민족상잔의 대 전란을 치른 직후였다. 전 국토는 거의 파괴되어 잿더미가 되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입을 것이 없어 얼어죽는 자가 부지기수(不知其數)이고 부모를 잃은 어린이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통은 마치 생지옥을 이루었으니. 이러한 세태에서 인정이 거칠어지고 윤리와 강상(綱常)도 허물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가 재건을 위하여서는 산업의 부흥과 더불어 도의의 심성과 의지를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내가 도의교육을 안동고등학교의 첫째 교육 목표로 설정한 것도 물론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나는 1952년에 안동고의 교육 목표 제정을 계기로 도의교육의 이론을 계속 탐구하고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전 교직원과 더불어 그 실천 방안을 축조(築造) 연구하고 이를 학생교육에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교육의 성과는 급속히 앙양(昻揚) 되었다. 그러자 경상북도 문교당국과 문교부는 이를 인정하여 이번에는 문교부 주최 [전국도의교육연구대회]를 안동고등학교에서 개최하라고 통지하였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변변한 기반 없이 역경을 자력으로 극복하여 아직 신설학교 모양새를 벗어나지 못 한 학교로서는 큰 영예이자 대임이었다. 나는 전 교직원들과 더불어 교육 목표인 도의교육과 노작교육 교훈인 성실과 근면 그대로 일체 과장과 허식을 배제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한 지난 3년간의 업적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엄정한 비평을 받을 자세로 대회를 준비하였고 수업 또한 평상시와 같이 시간표대로 침착하게 실시하도록 하였다.

개교한지 만 3년만인 1954년 10월 어느 날 마뜰 안동고등학교 바로 그 교사에서 [전국도의교육연구대회]가 개최되었다. 서울 문교부에서 온 허증수 차관님과 심태진 수석 장학관, 대구에서 온 경상북도 문사국장 및 장학관 장학사들과 경상북도의회의 김병동 부의장, 그리고 안동의 기관장과 유지 다수가 임석하고, 전국 각도의 장학사 및 교장 교사 400여명이 참석하였다. 성황을 이룬 참집(參集)한 인원의 규모로 장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론과 사례가 발표되고 진지한 관심과 검토 예리한 질의와 답변이 속출하였다. 참으로 예기 이상의 의의를 거둔 대회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정황(情況)이 선명하다.

대회 종료 직전 강평(講評)에서 심태진 수석장학관이

"전란으로 온 시내가 잿더미가 된 이곳에서 교사와 학생이 동심일체가 되어 흙벽돌로 교사를 건축하고 여기서 또한 열심히 공부하여 상급학교 진학에도 좋은 성적을 나타냈으니 이 학교가 비록 외관상으로는 다른 학교에 손색이 있으나 내실에 있어서는 어떤 학교보다도 훌륭한 학교라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전국 중등교육의 견인차들이 운집한 자리에서 문교부 수석 장학관이 토로한 이 호평은 무엇보다도 안동고 가족들로 하여금 지난 3년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면서 그 의의를 음미하게 해 주었다. 참관자들도 입을 모아 칭찬하여서 당시 안동고 가족을 물론 경북도 당국에서도 매우 기뻐하였다. 이와 같은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전교직원이 애쓴 결과이며 특히 안병태 교감과 김형근 연구과장의 공로가 컸다.

대회를 마치고 일행은 퇴계선생의 평일 강학(講學) 유흔(遺痕)이 서려있고 서거 후 학덕을 기려 봉향(奉享)하는 도산서원을 참관하여 더욱 뜻 깊었다. 그 때 대회에 참여하였던 전국의 중등교육 교육자들이 참관 과정에서 인식한 문제점과 도의교육의 방안을 임지로 돌아가 학생교육에 활용하여 전후 침체한 도의의 발양에 기여하였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당시 도의교육에 있어서 교재가 부족한 것이 큰 애로였다. 해방 후 9년이나 경과하였지만 초등학교를 위시하여 중 고등학교에 도의 교재가 없어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큰 고민이었다. 그래서 나는 문교부 심태진 수석장학관과 상의하여 초등학교용 [착한 생활] 6권(각 학년용) 중학교용 [도덕] 3권(각 학년용) 고등학교용 [도덕] 1권을 공저하고 이듬해 1955년 3월에 문교부 추천으로 민교사(民敎社)에서 출판하였다. '초등학교용'은 주로 시 수석장학관이 집필하였고, '중 고등학교용'은 주로 내가 집필하였다. 이 책들의 출간도 오래 기억에 남는 일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인가 1956년 6월 경상북도 장학관에 임명되어 나는 안동고를 떠나게 되었다. 안동고등학교 교장에서 도 장학관에 전임된 것은 당국에서 나의 안동고 운영 능력을 인정하여 발탁한 영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안동고를 보다 더 육성하고 싶었고, 고향인 안동에서 재직하며 부모님을 뫼시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최대의 행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리 달갑지 않았으나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던 그해 6월 폭양(曝陽)이 교정에서 작열(灼熱) 하던 어느 날, 나는 만 5년 남짓, 햇수로는 6년, 30대 말과 40대 초의 의지와 열정을 아낌없이 바쳤던 안동고등학교를 떠났다.

안동고를 떠난 지 이제 45년이 흘렀다. 뒷날 내가 서울 은평공고와 안양과학대학을 설립하고 60여 년간 교단 생활을 하게 된 것도, 안동고 개교와 발전 과정에서 터득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척정신'의 덕분으로 생각된다. 평생 안동고 시절을 잊을 수 없다.

권 상 철
(초대 교장 / 안양과학대학 이사장)